상징적 의미 그 이상의 영화, <82년생 김지영>

 

 

<82년생 김지영>을 통한 우리의 행보

지난 23일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영화라는 새로운 옷을 입고 독자와 마주했다. 많은 바람과 태풍, 눈보라의 흔들림에도 <82년생 김지영>은 꿋꿋이 피어올랐다. 사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내포된 의미나 내용을 떠나 ‘개봉’ 하나만으로도 가히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82년생 김지영> 제작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2018년부터 완성체를 세상에 내놓기 전까지 ‘영화 제작을 중단하라는 청와대 청원’부터 ‘개봉 전 영화 평점 1점대’ ‘출연 배우 SNS 악성 댓글 세례’ 등 거센 반대의 행렬이 이어졌으니 말이다.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82년생 김지영>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마주한, 마주했던 차별과 불합리한 부분을 서른네 살 김지영의 인생에 대입해 가감 없이 내지른다. 김지영을 통해 여성이 그간 느껴야 했던 감정의 응어리를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며 한없이 풀어 내린다. 세대에 영향을 받지 않고 많은 여성이 이에 함께 포효했으니 여성 앞에 처한 현실이 아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겠다. <82년생 김지영> 속 내포된 불합리함을 손끝, 발끝으로 느낀 엄마 세대의 경우 이는 더욱 가슴 시리게 와닿았을 것이다. 하지만 <82년생 김지영>의 내용을 근거로 삼아 몇몇 이들이 ‘세대를 막론하고 모든 여성이 현재까지 남성 중심적 사회 문화를 겪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부단히 어렵겠다. 성차별과는 거리가 멀어진 삶을 살아온 ‘X·N·Y 세대’가 <82년생 김지영>만을 앞세워 이를 주장하는 것은 더더욱 곤란하다.

사실상 우리는 과거의 악습을 끊어내고자 했던 수많은 여성 선배들의 강인한 목소리와 움직임의 영향을 받아 일정 수의 여성을 제외하고는 남성과 거의 동등한 지위를 갖추고 살아왔고 함께 나아가고 있다. 여성 선배들이 닦아놓은 단단한 길 위에서 ‘나’라는 존엄한 가치를 가지고 여성이라는 성별의 귀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특정 부분에선 어쩌면 남성보다 더욱 높은 지위를 갖추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전보다는 나아지고 있는 시대를 인정하며 남녀 상호 간의 어려움을 이해 및 조정하고 양보해 후세대가 더욱 다부지고 넓어진 ‘남녀평등’이라는 길을 마음껏 뛰어놀 수 있게 준비해놓는 것이다. 과거 존재한 성차별이나 이의 잔재들에 서로 맹목적인 비난을 보내거나 ‘남성 혐오’ 또는 ‘여성 혐오’적인 태도로 남녀 간의 분쟁을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소설 <82년생 김지영>과는 다른 관점으로 김지영과 그의 남편을 그려낸 것처럼.

 

누구나 인생은 쓴맛이다

<82년생 김지영>을 상영한 대부분의 관객들은 ‘엄마’가 생각나는, ‘엄마’에게 미안해지는, ‘엄마’의 인생을 헤아릴 수 있는 작품이었다고 말한다. 물론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자신보다 딸을 더 생각하고 자식을 위해서라면 두려울 것도 아쉬울 것도, 그 어떤 천군 마마도 두렵지 않을 듯한 김지영의 엄마를 보고 있자면 왜 그리도 엄마가 생각나던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향연과 마음속 깊이 자리한 미안한 감정에 너도나도 눈물샘이 터져 한참을 들썩인다. 하지만 <82년생 김지영>의 숨은 공신은 ‘아빠’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빠’가 된 유부남 부대의 일부이다.

‘아빠’. 우리 모두 10개월간 사람의 형태를 갖춰 세상의 빛을 본 후 가장 먼저 혹은 두 번째로 구사하는 언어이다. 즉 아빠 또한 엄마만큼의, 엄마 이상의 존재를 갖는다. 그러나 소통 및 표현의 부재와 바쁜 일상 등의 이유로 엄마가 우위에 오는 경우도 생긴다. 더불어 모든 이들이 그렇진 않겠지만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엄마의 인생은 아빠와 결혼하면서부터 빛이 졌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기자 또한 그리 생각한 적이 있다. 이에 <82년생 김지영>은 회사에서 나누는 일상적인 얘기 속 아빠들의 속마음을 흘려보내 그들의 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도록 한다. 커피를 마시며 허심탄회하게 “회사에서도 너무 힘들다. 그러나 집에 가도 쉴 수가 없다”라며 “정신과 진료라도 해야 하나” 너털웃음을 짓는 모습과 이후 마치 이런 이야기쯤은 일상이라는 듯이 “힘들어도 발맞춰 나아가야지” 하고 씩 웃어 보이는 설정은 짧지만 강하게 펀치를 날렸다. 얼얼하다. 아빠는 힘들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소설 속 <82년생 김지영>과 영화에서 비추는 <82년생 김지영>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확연히 다른 모습을 갖추고 있다. 소설과 영화를 두고 이질적인 부분을 굳이 하나하나 떼어내 찾으려 하지 않아도 단번에 느껴질 만큼 그 차이는 명확하다. <82년생 김지영>을 두고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영화로 새로이 각색된 <82년생 김지영>의 경우 ‘여성이 겪어온 차별이나 희생, 힘든 경험’만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김지영의 이야기만큼 광범위하고 분량이 길게 책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김지영의 남편과 주위 환경 요소들을 통해 ‘남성이 겪는, 남성 나름의 고충과 인생의 힘듦’을 담담히 읊조린다. 엄마의 인생은 에스프레소, 아빠 인생은 카페라테인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모두의 인생이 에스프레소였다.

 

그 누구보다 나와 함께

“가끔은 갇혀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출구가 없는 길이다. 사실은 내 잘못이다. 다른 이들은 출구를 찾았는데 나는 낙오한 것이다” 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하는 김지영의 대사 일부이다. ‘낙오’라는 표현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참 마음 아프다. 자신의 인생을 ‘낙오자’로 매듭짓기까지 얼마나 구슬펐겠는가. 현재까지도 <82년생 김지영>을 두고 성별 관계없이 다양한 갑론을박이 펼쳐지고 있다. 이성적·논리적으로 접근하는 단계는 이미 양측 다 넘어섰다고 본다. 양측 모두 <82년생 김지영>이 갖추고 있는 다른 방향의 깊은 울림을 들여다보기보다는 ‘누가 누가 더 성차별적인 삶을 살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서로를 겨냥하고 있으니 말이다.

<82년생 김지영> 속 김지영의 인생 일부에서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상당한 의미를 지닌 부분을 그려내는 핵심들이야 당연지사,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 단연 독보적으로 눈에 띄는 소재는 남과 여를 구분 짓는 부분들도, 모성애도, 동정심도 아닌 ‘나의 인생에서 내가 배제되었을 때 나타나는 변화’일 것이다. 이에 ‘내가 살아가는 인생, 나 하나 빠진다고 큰일이라도 나겠어?’ 싶은 이들도 분명 있겠다. <82년생 김지영>은 김지영 그녀 자신은 이러한 인생 회로에도 아무렇지 않아 할지언정, 그의 남편과 주위 사람들은 가끔 김지영이 자신이 아닌 다른 이가 되는 경험을 하는 것, 이후 해당 사건에 관해 김지영만이 아무런 기억도 하지 못한다는 점을 예시로 들며 ‘내 인생을 내 발로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에 힘을 싣는다.

결국 <82년생 김지영> 속 김지영이나 우리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떠한 상황에도 ‘나를 주제로 나의 일대기를 기록해 나가는 것’이다. 그 무엇도 내 삶에 조각을 낼 수 없으며 나의 목표를 흔들어 놓을 수 없다. 세대와 성별에 무관하게 창창한 미래를 앞두고 가장 신경 써야 할 것은 ‘가족’ ‘자식’ ‘친구’를 넘어 ‘나의 결정’이다. 어렵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억지로 주저앉지는 말자. 어쩔 수 없는 일들은 매 순간, 매달, 매년 나에게 다가오는 아주 가벼운 감기 같은 친구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리가 자꾸 풀린다면 김지영의 말을 기억하자. 그리고 나 자신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자.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나의 일부를 포기하지 말자고. 모두 “잘했다” “수고했다” “고맙다”

 

 

김채우 기자

codn189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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